역대인물(歷代人物)

1. 조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소주 가씨 인사

1) 가재창(賈在昌, 1897~1937)

가재창 선생은 1897년 11월 2일 안면읍 창기리에서 출생하였다. 아울러 광영신숙을 졸업한 후 〈조선독립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0년 10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정치범 처벌령 반역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사실이 확인되고, 광복 이전인 1936년 5월 31일에 타계하셨다. 〈안면도지〉의 인명록에는 남면으로 이거 후 행불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일제(日帝)의 악독한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긴 망국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영원히 씻으려 해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의 역사적 사실로 국권을 강탈당한 지 10년만인 1919년 기미(己未)를 전후하여 성난 파도처럼 일어나는 독립운동에 감연히 뛰어들어 서산(瑞山)에서 활약하던 지사(志士) 서병철(徐炳哲) 선생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 사재(私財)를 털어 임시정부(臨時政府)를 도왔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항일전사(抗日戰士)들의 자금을 지원키 위하여 날카로운 왜경(倭警)의 감시 속을 누비며 불철주야 동분서주하였으나 끝내 포박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 견디기 어려운 옥고를 겪으셨으니 그 얼마나 통분하였으랴! 불고가사 불고처자 오직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하여 몸 바친 그 장한 발자취는 오늘을 사는 우리 후세들에게 무한한 조국애와 겨레 수호의 결의를 용솟음치게 한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가창로(賈晶魯, 1892~1919)

충남 태안군 태안읍 상옥리 출신으로 초등교육은 국내에서 마쳤으며, 중학 과정은 일본 동경(東京)에 가서 마치고 때마침 3.1운동이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우렁찬 독립 만세와 인파(人波)가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 나오는 판국에 특히 유학생이 귀국한지라. 그를 감시(監)하는 왜놈 관헌(官憲)들이 매일 부락을 누비고 감시하는 도는 점점 심해지자 그의 학생 시절부터 우리 한국(韓國)은 독립(獨立)해야 한다는 정신이 강했던 독립사상이 날로 굳어만 갔던 것이며 때를 기다리고 틈을 노리는 평소에 품었던 항일의식(抗日意識)은 최고도(最高度)에 도달(到達)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헌병의 날카로운 어조와 감시 감독에 흥분이 되어 면도(面刀)로 헌병의 목을 베고 자기의 목까지 찔러 자결함으로써 왜놈들의 간담(肝膽)을 서늘케 하였다. 더욱 이제 막 피려는 꽃봉오리 청춘을 항일투쟁에 몸 바쳐 희생되고 말았으니 그 얼마나 안타깝고 값진 의거이냐! 이를 전해 들은 이들, 무한한 감격(感)과 분통(憤)함을 어떻게 이겨냈으랴! 예부터 인심이 강직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태안(泰安)이라 하였지만 일제의 학정에 항일투쟁한 자란 이 분 외에는 또다시 없으며 대대적인 의거는 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조국광복을 위한 저력의 일익이 되었음과 그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조국애(祖國愛)와 겨레 수호(守護)의 교훈(敎訓)에 조국광복(祖國光復)과 찬란한 큰 자료(資料)가 될 것이다.

3) 가재연(賈在衍) 선생의 독립운동 사항

가재연은 서산군 태안면(현 태안군 태안읍) 도내동에서 태어나 서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인천공립상업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인 차별대우를 느끼고, 교장인 야마모토 마사나리(山本正誠)의 억압에 반대하면서 다른 학생 20여 명이 학병 반대와 창씨 개명 반대 등을 전국에 확산시키려고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가재연은 졸업 후에는 이리 식산은행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가재연의 인천상업학교 동문으로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한 송재필이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방문하여 학병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역에 편지로 연락하다가 충북 영동서 고등계에 발각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이에 따라 가재연과 인천상업학교 재학 시절 친목회를 조직하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한 고윤희 정여수, 정태윤 등 23명의 인천상고 39회 동기생들이 1944년부터 1945년 초까지 속속 충북 영동서에 체포,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가재연은 체포된 이들 동기생과 함께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전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후 일경의 모진 고문과 수감 중의 여독으로 1945년 3월 29일, 결국 대전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광복이 되고 가재연을 포함한 인천상고 39회 결사대 23명 중 10명이 독립운동 논공이 인정되어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과 독립 유공 훈장을 받았다. 인천고교 교정에는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추모명비가 세워져 있다. 정부는 가재연의 일제 독립운동과 옥사 사실이 인정되어 드디어 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실제는 가재남(在南)이다.

4) 가명로(賈明魯)의 독립정신(獨立精神)

1995년 발행 〈태안군지〉에서는 가명로(賈明魯) 선생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1997년 발행 〈태안읍지〉의 역사 편에서는 가정로(賈鼎魯) 선생으로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가정로는 태안읍 상옥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1919년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고 보니 국내에서는 방방곡곡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귀국하자마자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일경들은 매일같이 주변을 돌면서 그를 감시하면서 그의 아내를 희롱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경들이 찾아와 불쾌한 어조로 무시하자 격분하여 면도칼로 자기의 배를 찔러 피를 내어 손바닥에 묻혀서는 안방의 벽에 “조선 독립 만세”라는 혈서를 써놓고는 숨을 거두어 이를 본 일경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로 선생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독립유공자 대열에 서지를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가정로 선생의 후손으로는 가명현 씨가 있으나 지금은 고향에서 살지를 않고 서울에 출타하여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학혁명과 가씨 인사

1894년에 발생한 동학혁명(東學革命) 때에 반대편에 서서 죽임을 당하였던 인사들은 당연히 충신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동학농민군에 대하여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국자(國者)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투사(鬪士)로 소개되지를 못하고 있었다.

〈안면도 승언리에 있는 애국지사 추모탑과 추모비〉

2. 동학혁명의 북접 지역 기포지 태안

동학혁명은 안으로는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밖으로는 일제 침략에 맞서 국권 수호를 외친 동학혁명 정신이야말로 애국 애족의 표상이고 근세 민주주주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동학혁명은 당초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와 학정으로부터 촉발되어 봉기였다.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에서 봉기한 남접의 규모가 충청도 북접에 비해 큰 규모였다.
그러나 1894 갑오년 당시 동학혁명의 불길은 충청도 지방에서도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동학의 북접 지역인 충청도 동학혁명의 불길이 태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충청도 서부 특히 내포 지역의 갑오 동학농민혁명의 주된 기포지는 원북면 방갈리와 근흥면 수룡리에 있는 토성산 및 이원면 포지리 등이었다.

가. 태안과 서산 전투

나. 해미와 신례원 전투

다. 홍주성 전투

라. 해미성 전투

마. 매현 전투

가의도(賈誼島)

한나라 충신 가의가 가의도에 들어왔다가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섬의 이름을 가의도라고 불렀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정조 연간에 신경준(申景濬)이 가의 관련설을 언급했고, 오늘날에도 지역민 사이에 널리 전하고 있다.

가의 관련설의 근거를 고찰해보면 지명과 성명이 동일한 데에서 나왔다. 지명 賈誼島의 한자 ‘賈誼’와 한나라 인물 ‘賈誼’가 동일하다. 가의 관련설이 언제부터 있어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늦어도 정조 연간에 지역민들 사이에 널리 펴졌음이 분명하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정조 연간에 신경준은 혹자의 말을 빌려 한나라 가의가 가의도에 머물렀다는 전설과 가의도에 가씨들이 많이 살았다는 사정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