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가씨는 조선의 국운이 쇠하여 어려울 때 명나라에서 원군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 가유약(賈維鑰)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자랑스러운 자손입니다.

가씨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가씨 성씨는 원래 고대 중국의 은(殷)나라를 멸하고 건국한 주 왕조(周王朝, BC1122~BC256) 시 태생한 황족 성씨로서 약 3,000여 년의 성씨 역사를 자랑한다. 원래 성(姓)은 누구의 가족인가를 구분하기 위한 것인데, 어머니 쪽의 가족 중심 시대에 쓰이던 것이다. 씨(氏)는 성으로부터 갈리어 남자를 칭하는 것으로 남자 모씨와 여자 부인(婦人)의 모성(母姓)의 자손이라고 구분하였다.
이러한 씨(氏)는 사람의 귀천(貴賤)을 구분하는 것으로, 귀한 자는 씨(氏)가 있었고 천한 자는 씨(氏)는 없고 이름밖에 없었다. 성(姓)의 기원은 중국 고대 역사(中國 古代 歷史)에 여(女)와 생(生)으로 구분되어 어느 부인의 자손이냐를 가름하는 요(姚), 사(姒), 희(姬), 영(嬴), 규(嬀), 길(姞), 강(姜) 등으로 계집녀(女) 자가 붙은 이름이 많았던 이른바 어미만 알고 아비를 모르던 모계사회의 유산이었다.
하(夏) 왕조의 성은 사(姒) 씨이고 은 왕조의 성씨는 자(子) 씨, 그 후손 중 송(宋) 씨가 분파했고 주 왕조의 성씨는 희(姬) 씨였다. 주실(周室)에서 제후(諸侯)와 백(伯)으로 분봉된 노(魯周公), 위(衛康叔), 연(燕召公), 진(晉唐叔虞), 가(賈公明)으로 모두 희(姬) 씨 성(姓)에서 제후와 백으로 분봉하여 그 봉지명(封地名)을 따서 다른 성씨가 된 것이다가씨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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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씨의 근본인 무왕(武王)의 주(周)나라 건국(建國)
주의 건국은 백성들이 7대 세습 후직(后稷)으로 추앙받던 고공단보(古公亶父, 주나라의 太王)를 인군으로 추대하면서 세워졌고, 그의 3子 계력(季歷), 계력의 子이며 서주의 성군으로 알려진 서백창(西伯昌, 후일 文王)이 신생 왕조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서백창은 견융족, 밀수, 우나라, 호나라를 정벌하여 영토확장과 주역(周易)을 집필하는 등 선군정치를 펼쳤으며, 위수 강가에서 학문이 높고 병술에 능한 강태공(姜太公, 封지명을 따라 呂尙)을 만나 사부로 추대하고 태공망(太公望) 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 發(BC1046~1043)은 정예 10만 군대로 과거 강성했던 은나라의 17대 왕이며, 경국지색 달기를 비(妃)로 삼았던 폭군 주왕(紂王)의 70만 대군을 목야에서 승전, 은나라를 멸망시킴으로서 주나라 건국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무왕은 서백창을 문왕(文王)으로 추증하였다. 관용과 기백이 출중했던 무왕은 숙청하지 않고 주왕의 아들 녹보를 은 땅에 봉하고, 논공행상 차원에서 장인이며 총사령관이었던 사상보 강태공(姜太公) 망(望)을 영구 땅에 봉하여 제(齊)나라로 하고, 형제인 주공단(周公旦)을 노(魯) 땅, 소공석(召公奭)을 연(燕) 땅, 숙진탁(叔振鐸)을 조(曹) 땅, 강숙(康叔)을 위(衛) 땅, 숙선(叔鮮)을 관(菅) 땅, 숙도(叔度)를 채(菜) 땅에 각각 봉했다.
홍루몽(紅樓夢)
홍루몽(紅樓夢)은 18세기 중반 청나라 중기 건륭제 때 쓰인, 구어체 중국 장편소설의 최고 걸작이다. 작가는 조설근(曹雪芹)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연의》(삼국지), 《수호전》, 《서유기》와 동시에 중국 4대 명저 중 하나로 꼽힌다. 등장인물만 721명에 달하며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묘사로 청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 소설로 칭송받고 있다. 남주인공 가보옥을 중심으로 임대옥과 설보채라는 세 젊은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과 슬픈 이별의 이야기, 그리고 젊은 아씨 마님 왕희봉의 전횡을 중심으로 하는 가씨 가문의 흥망성쇠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80회본과 120회본이 전할 만큼 분량이 방대하다.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홍루몽≫은 저자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후스(胡適)에 의해 조설근의 창작으로 정리되었다. 조씨 가문이 청나라 황실의 비호를 받기도 했으며, 가문의 흥망성쇠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소설의 내용이 작자의 자전적 내용이라는 평가다. 홍루몽은 문학적 가치,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전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홍루(紅樓)는 홍등가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중국의 전통문화에서 여성이 거주하는 구역을 일컫는 말이다.
활자본으로 출간되기 이전에는 필사본의 형태로 유포되었는데, 문제는 작가인 조설근이 원고가 출간되기 전에 사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설근이 최초로 작성한 원고 중 유실된 부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위원은 지인인 고악(1763~1815)에게 흩어진 필사본의 내용을 수집, 보완해 줄 걸 요청하게 되었다. 1791년과 1792년에 거쳐 ‘홍루몽‘이라는 제목이 붙은 120회본 소설로 출간하였던 거다.

숭의사(崇義祠)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0호
숭의사(崇義祠)는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양잠리에 있는, 소주 가씨인 가유약·가상·가침 등 삼대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00호로 지정되었다.
충남 태안군 남면 양잠리에 자리한 숭의사는 소주 가씨의 시조인 가유약, 가상, 가침 등의 삼대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사당이 건립된 연유를 살펴보면, 소주 가씨의 중시조인 가유약은 중국의 이름난 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들어와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는 가상, 가침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왜군과 싸우다가 부산에서 가유약과 가상은 전사하였다. 가침은 원수를 갚으러 전장으로 가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시체를 거두어 장사하고 묘를 모셨다. 그 후 가침의 아들 4형제는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륙과 가까운 태안으로 왔다가 배편이 여의치 못하여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태안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후손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조선 철종 2년(1851)에 숭의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으로 뜻깊은 건립 배경으로 인하여 숭의사는 1988년 8월 30일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안흥성과 가행건,석호집
조선시대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던 충남 태안군 ‘안흥진성’(安興鎭城)이 50년 만에 국민 곁으로 돌아온다.
국민권익위원회(위원장 김홍일)는 21일 충남 태안군 근흥면사무소에서 김홍일 위원장 주재로 태안군민 1만 9544명이 제기한 안흥진성 정비와 개방을 위한 군사시설 보호구역(보호구역) 해제를 요구하는 집단 고충민원을 조정했다.
조정 결과에 따르면 태안군과 국방과학연구소는 2025년까지 개방 범위를 정해 발굴·복원하고 안흥진성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나머지 부분도 정비한다. 문화재청은 태안군이 빠른 시일내에 안흥진성을 발굴·복원 등 정비를 하고 국민에게 조속히 개방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지원한다.
또 태안군과 국방과학연구소는 국방력 강화를 위한 원만한 무기 시험·평가를 지원하고 안흥진성을 성공적으로 정비해 조속히 국민에게 개방할 수 있게 상호 협력한다. 조정에 따라 안흥진성은 발굴과 복원을 거쳐 2026년부터 국민 누구나 출입하며 관람할 수 있게 된다.
안흥진성은 서해안 방어를 위한 요충지로 조선 선조 16년(1583년)에 지어진 성벽 높이 3.5m, 둘레 1717m 규모의 석성(石城)이며, 2020년 11월 국가사적 제560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국방과학연구소 안흥센터가 1976년 1월 문을 열면서 보호용 철조망이 설치돼 안흥진성의 45.3%에 해당하는 777m 구간의 출입이 전면 차단됐다. 이후 1989년 12월에 보호구역, 2022년 8월에 국가중요시설로 지정되면서 성벽이 무너지거나 붕괴 직전의 상태가 돼도 복원· 정비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방치돼왔다. 이에 태안군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 9544명은 올해 3월 ‘안흥진성을 발굴 및 복원해 국민에게 개방할 수 있게 보호구역을 해제해 달라’며 국민권익위에 집단 고충 민원을 제기한 바 있다.

소주 가씨 연원(淵源)과 역대 주요 인물
씨는 본래 중국(中國) 주(周)나라 문무(文武)의 후예(後裔)로 강왕(康王)이 당숙우(唐叔虞)의 둘째 아들 공명(公明)을 가후에 봉했으므로 나라 이름에 따라 성을 가씨로 하였다. 한국의 소주 가씨(蘇州賈氏)는 소주(蘇州)를 단본으로 하며 가유약을 시조로 삼고, 이충일효(二忠一孝)를 성씨의 표상으로 하는 명문 가문이다. 소주(蘇州)는 중국(中國) 강소성(江蘇省) 남동부 태호(太湖) 동안(東岸)에 위치한 고장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일찍이 춘추전국 시대에 오(吳)나라의 국도(國都)로 발전하였고, 역대에 걸쳐 주변 지역의 행정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가유약(賈維鑰) – 1,2,3대
호는 지백당(知白堂), 명(明) 신종(神宗) 때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급제했다. 병조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 상서성 추밀원사(尙書省 樞密院事), 태자소부(太子少傅), 문연각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냈다. 명 황제의 명을 받아 엄통구주리리지, 병부상서도어사(兵部尙書 道御使)로서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의 지리를 조사해 환국했다. 임진왜란(1592~1596)으로 조선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당해 선조가 명의 신종 황제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당시 병부낭중였던 가유약은 석성 병부상서와 함께 순망치한의 정연한 논리로 조선 파병을 관철했다. 1593년(선조 26년)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계요도찰사(薊遼都察使)로서 황명을 받고 조선에 들어왔다.
명 황제는 가유약에게 금 2만 냥과 비단 5천 필을 주고 옥절보도를 하사했다. 또 선조를 알현하고 친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가유약은 타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장병들을 위로하고 전공이 많은 자에게 금은보화를 공명정대하게 포상했다. 정유재란(1597~1598) 시 병부상서 겸 계요도찰사(兵部尙書 兼 薊遼都察使)로서 아들 가상(賈祥), 손자 가침(賈琛) 3대 참전, 울산, 나자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 서생진 도독동에 고장되었다.
가상(賈祥)의 자(字)는 필정(必禎), 명(明) 신종(神宗) 시 조선연병도사 겸 도독부참의군사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서 정유재란에 참전, 남원, 직산, 소사전투에서 전공을 세시고 동래 나자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 서생진 도독동에 장례되었다.
가침(賈琛)의 자(字)는 원보(元寶), 명(明) 신종(神宗) 시 병부 종사관(兵部 從事官)으로서 정유재란 시 13세에 조선(朝鮮)에 원병으로 참전, 아버지 상(祥)과 함께 남원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동래전투에서 조부, 부를 잃고 종전 후에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토착. 철종 시에 조부 유약(維鑰)과 아버지 상(祥)의 3대(代) 충효사당(忠孝祠堂)과 정문(旌門)이 왕명(王命)에 의해 태안군(泰安郡) 남면(南面)에 세워졌다


가행건(賈行健, 1798~1865)
가행건은 자는 강현(疆賢), 호는 석호(石湖)이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해 6세 때 이미 사서오경을 익혔다고 한다. 천품이 인자하고 인성이 쾌활 명랑하였고, 어려서부터 주위에서 천재로 불렸으며, 영웅적 리더십이 탁월했다. 헌종 조 을유년에 선략장군(宣略將軍) 명정(銘旌) 봉지관(奉持官) 겸 충무위(忠武衛) 부사용(副司勇)이 되었다. 철종 조 8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龍骧衛 副護軍), 9월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임자 5월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이 되었다.
이어서 계축 2월에 충남 안흥 양진 수군병마첨절제사(安興 梁鎭 水軍兵馬僉節制使) 겸 수성장(守城將), 관향장(管餉將)이 되었다. 그의 휘하에 18개 읍의 주사(主事)와 병마가 모두 종속해있었고, 당시 중국에 왕래하는 선박 통제와 국방 요새의 수비가 완벽했으며 왜구의 침범도 전무했다고 한다. 그가 수군병마첨절제사 재임 시에 안흥 지방은 전복과 해삼이 지방 특산으로 궁중에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엄동설한에도 백성들은 차가운 바닷물에 드나들며 해삼, 전복을 따다 관가에 바쳐 서울로 올려야 했다.
가행건은 이와 같은 민폐의 시정을 중앙에 강력히 건의해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이를 받아들여 진상공납을 폐지, 백성들의 고달픔을 덜게 했다. 수군병마첨절제사로서 선정을 베푼 가행건(賈行健)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그 비는 1861년(철종 12)에 동비(銅碑)로 안흥성내(安興城內)에 세웠으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비석을 군사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강제로 철수해갔다. 이후 1978년에 서산군수 이관현(李寬鉉)이 안흥항 입구에 흑요암으로 비를 복원(復元)하였다.
또한 가행건의 애민 선정을 기리기 위해 1860년(철종 11)에 세운 비석이 잔존하고 있는바, 그의 영세불망비와 함께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항 입구에 서 있다. 비석은 지붕돌 없이 받침돌과 비신(碑身)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은 높이 119cm, 폭 43cm, 두께 20cm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표면에는 ‘행첨절제사가공행건애민선정비(行僉節制使賈公行建愛民善政婢)’라고 음각되어 있다.
문무쌍전이었던 그는 생전에 문집인 《석호집(石湖集)》을 남겼다. 이 석호집은 현재 전본(傳本)이 없는 아주 희귀본(稀貴本)이다. 《석호집》은 목활자본 단본(單冊)으로 권두에 “崇禎五庚午(1870) 孟秋西何任憲晦述 石湖遺稿序, 崇禎二百十九年丙午(1846)一陽月下弦 大明民 蘇州後人石湖賈行健序”라는 소학요어서(小學要語序)가 있다. 이어서 그가 편찬한 소학요어(小學要語) 上, 下卷을 합부(合附)하고, 그다음에 석호집 권지단(石湖集 卷之單)이 있다. 권말에는 “崇禎二百四十三年庚午(1870) 五月上浣不肖子 가일영(賈日永, 울진 현령 역임) 謹識”의 기록(記錄)이 있다. 현재 약간의 부분적인 얼룩이 있으나 본문은 대체로 양호하다.
소주 가씨(蘇州賈氏)의 연원(淵源)과 동도사(東渡史)
“
나라에는 국사(國史)가 있고 사가에는 족보(族譜)가 있음은 나무의 뿌리와도 같고, 물의 근원(根源)과도 같아서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지엽(枝葉)이 무성(茂盛)하여 결과(結果)가 번창(繁昌)하고 원심(原深)한 물은 유파(流派)가 장원(長遠)한 법인즉, 우리 가씨(賈氏)는 본래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예(後裔)이니 금지옥엽(金枝玉葉)이 아닐 수 없는바 강왕(康王)이 당숙우(唐寂虞)의 아들인 공명(公明)을 가(賈) 땅에 봉(封)하여 백(伯, 伯은 諸候)을 삼은 고로 가(賈)로 성씨(姓氏)를 삼았느니라.
동양 대국이요, 세계 문명의 발상지의 일등 국민인 동시에 황조인 자손(皇朝人子孫)으로서 화족(華族)의 어느 씨족(民族) 앞에서도 떳떳하고 우뚝 솟아날 수 있는 성씨(姓氏)임은 물론 중국 본토에서도 탁월한 홍유(鴻儒)의 저서(著書)와 문무장상(文武將相)과 제후(諸候)의 관작(冠爵) 등 주연승관(珠連繩貫)이 불란무궁(不亂無窮)함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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